박신진 삼척제일교회 목사가 14일 강원도 동해시 천곡감리교회에서 열린 최인규 권사 순국 순교 제82주기 기념예배에서 최 권사의 약력을 소개하고 있다. 천곡교회 제공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신앙을 지키다 옥중에서 순교한 최인규(1881~1942) 권사의 삶이 계엄 사태 속 일부의 침묵과 비호로 논란이 된 한국교회 안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선 그의 순교 신앙은 믿음의 본질과 책임을 다시 묻게 한다.
“나는 예수 믿는 최인규요. 신사참배를 거부한 최인규요.”
1942년 12월 16일. 생명이 꺼져가는 와중에도 최 권사의 말에는 저항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14일 강원도 동해시 천곡감리교회(담임목사 이형열)에는 최 권사의 순교 신앙을 기억하는 후배 신앙인들이 모였다. 순교 82주기를 기리는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그의 삶을 돌아보며 경건한 시간을 가졌다. 예배에서는 최 권사의 일대기를 재조명하는 순서가 진행됐다.
1940년대는 한국교회에 가장 암울했던 시기로 꼽힌다. 일제는 신사참배와 창씨개명, 황국신민서사 낭독 등을 강요하며 민족의 정신을 억누르려 했다. 교회들조차 그 압박에 굴복해 1938년 조선감리교회를 포함한 대다수 교단이 신사참배를 공식 결의했다. 강원도 동해에 살던 평신도 최인규 권사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나는 하나님 외에 누구도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며 일제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결단은 혹독한 대가로 이어졌다. 일제는 그를 요시찰 인물로 지정했고 경찰은 그를 붙잡아 모욕과 조롱을 일삼았다. 똥지게를 진 채 마을을 돌게 하며 “나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람”이라고 외치게 했다. 최 권사는 이에 굴복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외쳤다.
체포된 그는 삼척 경찰서에 갇힌 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그곳에서 그는 매일 신사참배와 황국신민서사 낭독을 강요받았다. 이를 거부할 때마다 그는 채찍과 몽둥이에 맞고 발길질과 주먹질에 시달렸다. 몸은 멍투성이가 됐지만 그는 끝까지 타협하지 않았다.
형무소 간수들은 “너희 신이 너를 구할 것 같으냐”며 조롱했지만 그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대답했다. 고문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동료 수감자들에게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고 격려했다.
최인규 권사. 국민일보DB
이번 순교기념예배는 기독교대한감리회(감독회장 김정석 목사) 동해삼척지방회 소속 교회들의 연합으로 진행됐다. 예배에서는 최 권사 이름으로 6명의 지역 학생들에게 장학금이 전달됐다. 나라와 민족, 교회의 미래, 순교 신앙을 본받기 위한 특별기도도 이어졌다. 최 권사가 처음 예수를 믿고 교인으로 등록한 북평제일교회(김현 목사), 최 권사가 전 재산을 내놓아 세운 천곡감리교회(이형열 목사), 최 권사의 유골을 수습해 40여년간 보관한 삼척제일감리교회(박신진 목사)는 앞으로도 기념 예배를 통해 순교 신앙 계승에 힘쓴다는 계획이다.
안위보다 믿음의 본질을 택한 최 권사의 삶은 오늘날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교회란 무엇이고 신앙이란 무엇인지, 믿음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김현 목사는 “최 권사님은 신앙의 절개를 지킨 분”이라며 “그의 믿음을 계승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이형열 목사는 “순교 신앙은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교회와 성도들에게 중요한 도전”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최 권사는 평신도로서는 드물게 2023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았다. 이는 신사참배 거부와 항일운동의 공로를 인정받은 결과다.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 기준을 개정한 뒤 지정된 첫 사례이기도 하다.
손동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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