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관객을 만난 도립극단의 기획공연 무대. 왼쪽 사진은 춘천 사회적협동조합 무하와 협업한 ‘물의 진혼곡’
지금은 소양강 윤슬 아래 잠겨있는 춘천 내평리. 74년 전 그곳에서 벌어졌던 동족상잔의 비극 속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형제, 누군가의 연인이었던 평범한 이웃이 나라를 지켜낸 숭고한 희생이 내밀하게 그려졌다. 도립극단과 춘천 사회적협동조합 무하가 협력제작한 기획공연 ‘물의 진혼곡’이 93%의 예매율을 기록하며 인기를 실감케 했다. 극은 시력을 잃으면서 시각장애를 얻었지만 무대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남호섭 배우의 독백으로 시작됐다. 발끝으로 무대를 느끼고, 호흡으로 대사의 타이밍을 맞추는 그의 섬세한 연기는 관객을 일순간 무대 안으로 끌어들였다. 내평리 주민들이 일상의 평온함 속에서 맞이했던 전쟁의 예고는 조명과 음악을 통해 절묘하게 연출됐다. 무대 위에 하얀 천이 나부끼며 소양강의 물결을 떠올리게 했고, 극 내내 울려퍼지는 빗소리는 비극을 암시했다. 죽음이 닿기 전 못다 한 고백들이 절절하게 이어지며 객석의 마음을 흔들었다. 풋내 나는 고백의 순간, 새 생명의 탄생…. 평소라면 기쁨을 나눴을 순간들이었지만, 결말을 모두 알기에 객석 에서 눈물이 터져나왔다. “집에 쳐들어온 사람 잡는데 여자, 학생이 무슨 상관이냐. 우리 이웃을 지키자”는 말을 끝으로 희생된 그들의 삶은 소양강 댐 아래 조용히 흘렀다. 극이 끝난 후 배우들이 스스로 흰 천을 덮었는데, 스스로 희생될 것임을 알면서도 포화속으로 뛰어든 그들을 기리는 동시에 수몰된 내평리를 나타내기도 했다. 극은 이제 그들을 기억하는 일은 우리의 몫임을 깊은 울림으로 전했다. 무대 위 이동하는 진지는 남북 지도모양을 형상화, 닿을 수 없던 당시의 이데올로기를 비유했다. 공연장 곳곳의 세심한 연출도 돋보였다. 솔방울 수류탄 가랜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군화 속 무성한 풀 등 그 시대의 아픔과 기억을 고스란히 담아낸 세심함이 또다른 재미를 선사했다. 이번 작품은 김경익 도립극단 예술감독이 28년 전 처음 쓰고 연출했던 작품과 이름이 같다. 당시는 대형 수족관을 만들어 실제 물을 활용했는데 결과가 영 기대에 못 미쳤다고 한다. 이후 무하의 ‘68분’에서 소재를 얻은 후 오래 묻어왔던 이 타이틀을 꺼내게 됐다. 공연 직전 비상계엄 선포가 이뤄지면서 제작진들의 우려도 있었지만, 무탈하게 끝날 수 있게 됐다. 김경익 감독은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의 사례를 언급하며 전쟁 중 예술의 역할에 대한 소회도 밝혔다. 그는 “한국전쟁 중에도 계속된 연극은 관객에게 현실의 두려움과 고통을 잠시나마 잊고, 용기와 희망을 선사했다”며 “시대가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는 공연으로 관객을 만나야겠다는 결의가 생긴다”고 했다. 최우은
▲ 오른쪽은 속초 극단 파.람.불과 함께 한 ‘PASS’ 공연 모습.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이기어 낮잠을 자거든/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를 떠돌겠습니다” (한용운 ‘나의 꿈’ 중) 1929년 조선을 대표하는 양대 대도시인 서울과 평양에서 열렸던 ‘경평대항축구전’은 1946년 해방 이후 남북이 나뉜 상태에서 마지막 대회를 치렀다. 당시 서로가 첫눈에 반했던 강릉 출신 경성군 스트라이커와 속초 출신 평양군 응원단장의 사랑이 한용운 시인의 시구로 울려퍼졌다. 도립극단과 속초 극단 파·람·불이 협력제작한 축구연극 ‘PASS’가 지난 15일 속초문화예술회관에서 막을 내렸다. 주말 이틀 동안 500여 명이 관람, 88%의 예매율을 기록했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졌던 ‘축구연극’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공연 시작 직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무대는 그 자체로 하나의 스타디움(경기장)이 되어 배우들은 축구 퍼포먼스를 선보였고, 타악기 연주와 민요 등의 화려한 퍼포먼스를 펼쳐냈다. ‘축구’라는 스포츠경기의 소재가 주는 역동성, 즉흥성, 놀이성을 최대한 끌어내 관객의 시·청각을 끊임없이 자극했다. 무대와 경기장의 경계가 허물어진 공연장은 그야말로 ‘신명나는 장’의 연속이었다. 양 극단의 최고령 배우단원인 류창우(강원도립극단)·석경환(파·람·불) 배우 역시 70분간 무대 위를 날아다니며 관객에게 긍정적인 메시지를 선사했다. 연극의 생명력이 고스란히 전해진 순간이었다. “남들은 님을 생각한다지만 나는 님을 잊고저 하여요/…(중략)/아아 잊히지 않는 생각보다 잊고저 하는 그것이 더욱 괴롭습니다”(한용운 ‘나는 잊고저’ 중) 현재는 무기한 중단된 ‘경평대항축구전’. 닫힌 결말 속 펼쳐지던 두 청춘의 이루어질 수 없는 가슴 아픈 사랑은 한용운 시인의 시를 토대로 엄태환 작곡가의 손에서 새롭게 탄생했다. 노래는 설렘과 애절함을 오가며 당시 청춘들의 뜨거운 감정선을 진지하고도 섬세하게 담아냈다. 공연 후 관객들이 음원 발매를 요청하는 등 반응도 뜨거웠다. 관객 강신우 씨는 “공연이 끝난 후에도 계속 흥얼거릴 만큼 중독성 있는 노래”라며 “무대 위에서 축구를 하고 관객들도 함께 응원을 하니 실제 축구 경기장을 온 것 같았다”고 전했다. 현대영 연출은 “내가 생각하는 청춘은 데미안의 구절처럼 자신의 세계를 투쟁하고 싸워서 깨고 날아가려하는 모습”이라며 “그런 청춘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하필 광복된 시점, 나라를 재건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들의 모습은 한용운 시인의 시와 맞닿아 있다”고 했다. 이어 “한 명이라도 ‘연극이라는 게 재밌었네’, ‘한 번씩 극장에 가보자는 생각을 하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최우은 #한용운 #소양강 #내평리 #누군가 #도립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