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좋아 빠르게 가’ 밈으로 알려진 윤석열 대통령의 후보 시절 공약 쇼츠 영상.
남아 있는 일이 산더미와 같으니 이제 시작이라고 하는 편이 맞겠습니다. 내란 세력의 음모를 소상히 밝히고 엄단하여 ‘윤석열 시대’의 교훈을 역사에 새기는 일이 무엇보다 급선무입니다.
그와 함께 오랜 시간 곁에 두고 들여다봐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윤석열을 걸러내지 못했을까’라는 것이죠. 지금 이 순간 ‘거봐, 내가 뭐랬어’를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겠지만, 결국 한국 사회가 윤석열이라는 지극히 예외적인 리스크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한순간 ‘공화국’이 삭제되는 집단 체험이었으니, 이 문제를 언제까지고 미제 사건으로 남겨둬선 곤란할 것입니다.
부디 치열한 탐구와 토론이 이어지길 바라면서 두툼한 사건 보고서에 각주로 첨부할 만한 키워드를 하나 제안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밈’(meme)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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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난 14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일대에서 열린 범국민촛불대행진 집회에서 시민들이 응원봉을 흔들며 기뻐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email protected] 밈의 법칙: 커뮤니티를 만들다
밈을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콘텐츠’ 내지는 ‘온라인 상의 웃긴 게시물’ 정도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지만 그 진짜 뜻은 문화인류학적 통찰에 가깝습니다. 옥스퍼드대학 출판부가 정리한 설명을 보시죠.
유전자와 비슷하지만, 유전적 전달이 아닌 모방을 통해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전파되는 자기 복제적(self-replicating) 문화적 요소 또는 행동 패턴…(중략)…대표적인 예로 선율, 아이디어, 신념, 문구, 이야기, 헤어스타일, 패션, 요리법, 발명, 기술, 전통, 이론 등이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인류가 유무형의 매개체를 통해 주고 받은 모든 정보가 밈입니다. 김치찌개 레시피부터 직접 지은 노랫말까지 ‘창조-복제-변형’의 작동원리를 따라 사람들 사이에 퍼져가는 모든 것을 ‘광의의 밈’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은 다만 그 전파 속도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속했을 따름입니다.
유전자(gene)와 마찬가지로 밈도 몇 가지 규칙을 따릅니다. 첫째, 밈의 전파력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공감대를 형성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밈은 통용되지요. 이것을 ‘밈풀’(meme pool)이라고 합니다. 일베저장소(일베)에서 만들어졌으나 일베 바깥의 사람이 웃을 수 없는(동의할 수 없는) 밈은 일베 안에 머물게 됩니다.
둘째, 당연한 얘기겠지만 전파력이 좋은 밈은 그렇지 않은 밈보다 오래 살아남고, 이는 곧 변이로 이어집니다. 2005년 미국인 만화가 맷 퓨리가 창조하였으나, 원본과 아무런 관계없는 맥락에서 통용되다 지난 십여년 인터넷에서 가장 유명한 필수 이미지로 자리잡은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가 대표적입니다.
개구리 페페.
즉, 밈은 커뮤니티를 만들어냅니다. 밈의 전파력이 닿는 곳이 커뮤니티의 경계가 되고, 그렇게 군집을 이룬 사람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 취향은 물론 사상까지 공유하는 느슨한 공동체가 됩니다. 같은 밈을 보고 웃을 수 있다면, 선호하는 대통령 선거 후보도 같을 공산이 크다는 것이지요.
밈의 정치: 민주주의를 포획하다
이 원리를 꿰뚫어 본 정치인은 밈을 매개로 광범위한 커뮤니티에 접속하고 그들을 선거 캠페인에 동원할 수 있습니다. 도널드 트럼프가 그 일을 해냈죠.
영미권 밈의 총본산이자 2000년대 후반부터는 극우 아지트가 된 커뮤니티 가운데 포챈(4chan)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트럼프는 그들이 만든 밈을 제 소셜 계정에 올리며 자신을 포챈의 밈풀 안으로 밀어 넣었고, 포챈 유저들은 더 많은 밈을 유통하며 화답했습니다. 2016년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포챈 유저들은 “트럼프는 우리가 창조한 작품”이라고 으스댔습니다. 이는 물론 트럼프의 정치적 구호가 포챈 이용자 다수(젊은 백인 남성)의 취향에 잘 맞았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밈은 정치인과 유권자가 서로를 알아보는 증표 노릇을 했지요.
윤석열 대통령이 10월2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브리핑룸에서 열린 공동언론발표에 참석해 영상카메라의 붉은 표시 뒤로 발언을 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윤석열 대통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대선 당시 소수자와 지역에 대한 비하, 진보 정치에 대한 반감, 여성혐오 등 코드를 공유하는 남초 커뮤니티의 문법에 동조하는 선거운동을 펼쳤습니다.
특히 중추가 된 것은 ‘반페미니즘’이었죠. 국민의힘 캠프가 펴낸 공약 자료에서 여성 경찰을 비하하는 밈인 ‘오또케’가 발견되기도 했고, 대뜸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일곱 글자를 페이스북에 올려 실제 지지율 상승 효과를 보기도 했습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여가부 폐지’라고만 적는 이 정책 홍보 방식은 앞뒤 맥락을 제거하고 선동적인 구호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밈적 사고’의 결과물이라 할 만 했습니다.
지금은 철천지원수가 됐지만 당시에는 당대표로 개고기를 열심히 팔았던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이, 누구보다 ‘이대남’들의 코드를 잘 이해한 정치인으로서 큰 역할을 했고, 전략은 효과적이었습니다. 2022년 20대 대선 출구조사 결과를 보면, 전 연령대 가운데 유의미한 성별 격차를 보인 집단은 2030 뿐입니다. 30대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을 찍은 남성(52.8%)이 여성(43.8%)보다 9%p 많았고, 20대에서는 그 차이가 무려 24.9%(남성58.7% 여성 33.8%)에 달했습니다.
밈의 반격: 독재자를 함락하다
밈 연구자로 ‘한국 인터넷 밈의 계보학’(2024)이라는 책을 쓴 김경수 평론가는 지난 3일 윤석열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속 표현을 열거하며 “서로를 적대시하고 가르는 인터넷 속 정치적 밈의 언어와 판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대통령이 ‘척결’, ‘패악질’, ‘범죄자 집단의 소굴’,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세력’, ‘입법 독재’ 등 자극적인 표현으로 논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밈풀 바깥에 있는 이들과 소통할 의지가 애초 없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보다 더 극단적인 버전의 언어를 12·12 담화에서 확인했죠.
2019년 9월 홍콩 침사추이에서 민주화 시위에 참석한 시민이 ‘가이포크스’ 가면을 쓴 채 ‘개구리 페페’ 인형을 들고 있다. EPA 연합뉴스
그러나 당연하게도, 밈이 늘 극우 커뮤니티와 독재자의 무기일 수는 없습니다. 일례로 앞서 최장수 밈으로 언급한 개구리 페페는 포챈에서 오랜 세월 극우의 상징으로 유린당하다가(원작자가 매우 힘겨워했습니다) 2019년 홍콩 시민들의 민주화 시위에서 저항의 밈으로 복제·변형되면서 일부 명예를 회복한 바 있습니다.
3일 비상계엄 선포부터 14일 탄핵소추안 가결에 이르는 지난 열흘 남짓한 기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한국인이 뉴스를 붙들고 지냈던 이 시기에 밈 역시 폭발했습니다. 계엄군을 피해 월담하는 국회의장부터 1차 탄핵 표결에 불참한 여당 의원 이름을 부르짖는 본회의장 풍경, 전두환 군부의 반란을 다룬 영화 ‘서울의봄’(2023)에 빗댄 패러디, 계엄령에 식겁한 연예인들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등이 퍼지며 ‘반 내란 커뮤니티’를 공고히 했습니다. 어처구니 없고도 공포스러운 윤 대통령의 내란 시도에 반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었으니, 근래 한국 사회에 존재했던 그 어떤 밈풀보다도 포용적이고 거대한 문화공동체였을 것입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지난 12일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서 열린 \'내란주범 윤석열 즉각 탄핵, 구속 내란동조 국민의힘 해체\'를 요구하는 노동자 시민대회를 하고 있다. 정용일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그리고 이것은 오프라인에서 더 다채로운 연결과 풍성한 상징으로 뻗어 나갔습니다. 촛불은 형형색색 응원봉으로 변형되어 다양한 색의 연대라는 민주주의의 함의를 직관적으로 은유하였고, 2016년 이화여대생들이 경찰 앞에서 합창했던 ‘다시 만난 세계’(2007·소녀시대)는 ‘임을 위한 행진곡’(1981)과 위상을 나란히 하는 민중가요로 자리매김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케이팝 메들리를 광장에 끌고 나왔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의 항쟁은 그렇게 2024년 12월의 투쟁으로 확장되었죠.
밈은 두 가지 규칙을 따릅니다. 전파되는 만큼 커뮤니티의 크기를 규정하고, 더 길게, 더 멀리 퍼질수록 오래 살아남습니다. 우리는 윤석열과 민주주의 가운데 후자의 밈을 더 오래 전달하기로 합의했고 유감없이 실천했습니다. 그쪽이 한국이라는 공동체를 더 크고 더 오래 보존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미디어 잔혹사는?
유튜브 댓글부터 저녁 뉴스 날씨예보까지 미디어의 영토는 드넓습니다. 늘 논쟁이 끊이질 않는 영역이지요. 이곳에 익숙하고도 새로운 전선이 들어섰습니다. 언뜻 정치적 이전투구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실은 우리의 일상에 깊이 연루된, 자유에 관한 싸움이기도 합니다. 그 투쟁담을 중계해드립니다.
박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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