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 놀러갔다가 노트르담 대성당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숭고함이 아니었다. 고단함이었다. 이 얼마나 욕 나오는 걸작인가. 아마 겨울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어느 더럽게 추운 날에도, 새벽부터 돌을 깨고 나르고 저 가장 높은 곳에 매달려 미장을 했을 것이다. 어이 김씨, 물론 불어였겠지만, 서로 상스럽게 불러 젖히며 가장 저속한 어휘로 안부를 주고받았을 숱한 잡역부들. 결국은 그들이 완성한 것이다. 5년 전 실화(失火)로 불타 무너진 대성당이 지난 7일 다시 문 열었을 때,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이 성당의 위대함이 모든 이의 노력과 뗄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성당을 바로 세운 건 교황도 의회도 아닌 ‘노가다’일 것이었다. 인부 혹은 막노동꾼. 그러나 어쩐지 일본식 은어로 불러야 존재감이 더 분명해지는, 행동과 성질이 거칠고 불량한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거친 환경에서 힘 쓰다 보면 거칠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전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근처 공사판 인력 무리에 잠시 섞인 적이 있다. 그 짧은 순간에도 어찌나 분주히 가래침을 뱉어대는지 돌림노래처럼 들릴 지경이었다. 학력은 불필요하고 사지만 멀쩡하면(혹은 멀쩡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 건설하는 일이지만 결코 건설적인 일로 간주되지는 않는 일. 드잡이가 예사로 벌어지고 욕설이 문안 인사처럼 따라붙는 그곳에서, 그러나 문명은 높이를 형성할 수 있었다.
건설 현장에서 철근을 살펴보는 작업자들. /조선일보 DB
일상을 가장 낮잡아 부르면 노가다가 될 것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는 반복 작업을 폄하할 때 흔히 쓰인다. 삽질처럼. 그러나 쌓아 올리는 행위는 언제나 위험을 동반한다. 고(高)부가가치가 약속되지 않아도 모두가 어느 정도는 목숨을 걸어야 한다. 지난주에도 제주도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50대 작업자가 숨졌다. 현역 ‘노가더’ 송주홍 작가는 “노가다라는 게 그렇게 간단치 않다”고 일갈한다. 온몸으로 때우는 삶, 피곤하면 땅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아 레쓰비를 홀짝일지언정 “내 줄자로 치수 재서 내가 히로시(눈금 표시)한 것만 믿는”(책 ‘노가다 칸타빌레’) 뚝심 없이는 다 무너질 것이기에. 고담준론과 형이상학에서조차 노가다의 흔적은 발견되곤 한다. 제아무리 대단한 명저여도, 박스에 담고 트럭에 싣는 누군가의 두툼한 손끝이 없다면 활자는 기능을 잃을 것이다. 노가다는 공사장 너머 어디에나 있다. 필부필부의 근로(勤勞)가 모여 이 세상의 하중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은, 한겨울 그들의 정수리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기처럼 분명해 보인다. 다만 이를 악물고 일하느라 철저한 익명으로 남는 사이, 엉뚱한 자들이 마이크를 잡고 세 치 혀로 자신의 이름을 연호한다. 가장 안전한 높이의 단상에 올라 “나를 따르라”며 굳은살 없는 용기를 과장한다. 진정 위험천만한 곳은 바로 그 입이다. 성당 하나 다시 세우는 데 5년이 걸렸다. 하물며 나라야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곳곳에서 불안한 균열이 감지되고 있다. 고단할 것이다. 결국에는 땅 가장 아래의 민초(民草)가 또다시 맨땅을 밀어 올려야 할 것이다. 흙먼지 위에 물을 뿌리듯,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분노를 탁 뱉어내면서. 어이, 똑바로 좀 합시다? 그러니 누구라도 공든 탑을 무너뜨리려 한다면, 지금껏 듣지 못한 살벌한 욕지거리를 각오해야 할 것이다. 아주 무서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