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 뉴진스 멤버들이 하이브에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 복귀를 요구하며 제시한 시한인 지난 9월25일 서울 용산구 하이브 사옥 앞에 뉴진스 팬들이 보낸 근조화환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요즘 기획사 앞이 초상집이다.”
엔터테인먼트업계 한 관계자의 말이다. 기획사 사무실 앞에서 툭하면 벌어지는 근조화환 시위 때문이다. 팬들 사이에서 자신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말이 도는 순간, 어김없이 국화꽃이 당도한다. 치우지도 못한다. 엄연히 집회 신고를 마치고 법에 맞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화환 배송·수거와 집회 신고까지 대행해주는 업체가 있을 정도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출근할 때 늘어선 근조화환을 보면 마음이 무겁다.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고 말했다.
최근 에스엠(SM)엔터테인먼트는 신인 그룹 라이즈의 한 멤버로 골머리를 앓았다. 이 멤버는 지난해 사생활이 담긴 사진이 에스엔에스(SNS)에 유포되면서 논란이 일자 무기한 활동 정지에 들어갔다. 그러다 지난 10월 에스엠이 이 멤버의 복귀를 발표하자 라이즈 팬들은 ‘절대 불가’를 외치며 근조화환 시위에 들어갔다. 결국 에스엠은 그의 복귀를 철회했다.
케이팝 기획사들의 지나친 상술이 팬들을 울리는 한편, 거꾸로 기획사에 대응하는 팬들의 집단행동이나 시위가 점점 더 정교해지고 강도도 세지고 있다. 최근엔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고 직접 고발에 나서는 등 그 양상이 과거 ‘단순 항의’ 차원을 넘어섰다. 최근 소속사와 분쟁 중인 뉴진스의 팬들은 하이브에 대한 고용노동부 으뜸기업 지정을 철회해달라는 국회 청원을 열흘 만에 5만명 동의를 받으며 성사시켰다. 이 안건은 현재 정식 접수돼 국회 소관 위원회에서 본회의 상정 여부를 심사 중이다. 하이브 아이돌 문건 등을 조사해달라는 청문회 개최 요구 국민청원도 5만명을 채웠다. 팬들은 지난 10월 서울 용산경찰서에 김주영 어도어 대표이사 등 경영진을 업무상 배임 혐의로 고발하기도 했다.
이처럼 팬들 움직임의 차원이 달라진 데는 에스엔에스 등 팬들이 뭉치고 목소리를 전파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진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과거에는 팬클럽 안에서만 논란이 일고 마는 등 ‘찻잔 속 태풍’에 그쳤다면, 이젠 세력을 규합하고 대처 전략을 짤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진 것이다. 또 다른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팬들의 항의는 과거부터 있었지만, 최근에는 팬들이 결집할 수 있는 통로가 다양해지면서 팬덤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구성원도 다양해졌다”며 “팬덤 안에 있는 법률·회계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가세해 단순 항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기획사로선 큰 부담이다”라고 털어놨다.
팬덤의 정당한 항의는 케이팝 산업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대형 기획사의 횡포를 소비자 스스로 견제하는 소비자 주권운동의 차원도 있다. 하지만 강력한 팬덤을 무기로 도를 넘어서는 간섭을 하는 경우는 문제로 지적된다. 노래나 뮤직비디오가 발표되면 그룹 멤버들의 분량을 체크해 자신이 좋아하는 멤버의 분량이 적다며 압력을 행사하는 사례까지 있다. 한 기획사 관계자는 “팬들이 음악적 색채나 멤버 구성까지 영향력을 끼치려는 것은 과하다. 기획사 스스로 중심을 잘 잡아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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