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참정권도 없었던 19세기 하버드엔 우주의 위대한 발견을 가능케 한 천문학 컴퓨터(계산원)들이 있었다. 배우 안은진이 당대 숨은 천재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 역으로 주연한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가 오는 28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한다. 사진 국립극단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던 19세기 초 우주의 크기를 측정하는 토대를 마련한 여성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의 삶이 무대 위에서 부활했다. 배우 안은진의 7년 만의 연극 복귀작, ‘사일런트 스카이’(연출 김민정, 28일까지)가 서울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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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은진 "이게 무대의 맛, 전미도 언니한테 조언받아"
영화 ‘시민덕희’를 비롯해 넷플릭스 드라마 ‘종말의 바보’, MBC ‘연인’(2023), JTBC ‘나쁜엄마’(2023) 등 종횡무진 활동해 온 안은진의 인기 덕분에 지난달 29일 개막한 공연은 일찌감치 매진됐다.
2012년 김민정 연출의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데뷔 후 연극 ‘유도소년’(2017)까지 꾸준히 무대에 섰던 안은진은 9일 기자간담회에서 “오랜만이라 떨렸지만, 무대에 올라가니 ‘아, 이게 무대의 맛이었지’ 싶더라. 영화‧드라마와 달리 무대는 멀리서 몸 전체를 보시니까, 몸의 표현을 확장하려고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함께 출연한 뮤지컬 배우 출신) 전미도 언니한테 조언도 받았다”면서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서 하는 위로가 큰 울림이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는 우주의 거리 측정의 토대를 마련한 천문학자 헨리에타 레빗(1868~1921)과 하버드대 여성 컴퓨터(계산원)들의 삶과 성취를 밝힌 작품이다. 주연 배우 안은진은 7년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했다. 사진 국립극단
‘사일런트 스카이’는 근대 여성 과학자를 잇따라 다뤄온 미국 극작가 로렌 군더슨의 작품으로, 그의 작품이 국내에 소개되는 건 처음이다. 연극 ‘비너스 인 퍼’ ‘인형의 집 PART2’ 등을 연출한 김민정 연출이 윤색까지 맡았다.
“처음 대본을 보고 경이로움과 호기심이 밀려왔다”는 그는 “광활한 우주를 상상했을 때 나란 존재에 대한 의구심과 고민이 드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전했다. 이런 연출 의도를 저마다의 유리천장을 깨고 삶의 의미를 찾아 나선 여성들의 연대에 녹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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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여성 과학자 향한 편견 "바지 입는 여자들 가관"
청력이 좋지 않았던 헨리에타는 말년엔 암투병하며 연구 열정을 이어간다. 침묵만을 강요받았던 여성 과학자들의 업적은 그들의 발견에 근거한 후속 연구가 잇따르며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사진 국립극단
연극의 첫 장면, 1900년 미국 위스콘신주 시골 목사의 딸 헨리에타(안은진)가 하늘과 맞닿은 무대 안쪽에서 걸어 나온다. 희미하던 그의 목소리가 점차 객석에 다가와 또렷해진다. “빛의 과학이 저 높은 곳에 있습니다. 아득히 먼 곳, 외로이. 우주의 가장 깊은 어둠에 묻힌 모든 것들 중에.”
당시 천문학계에서 여성 과학자야말로 어둠 속에 묻힌 존재였다. 결혼하지 않고 연구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헨리에타의 결심은 여동생 마거릿(홍서영)의 이런 염려에 가로막힌다. “요즘 여자들 바지 입고 다니는 거 가관이더라.” “세상이 변해도 지켜야 하는 게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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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커링의 하렘' 비하…성대결보단 여성 연대 초점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하버드 천문대의 최초 여성 컴퓨터로 알려진 윌러미나 플레밍 역의 박지아는 지칠 줄 모르는 근성과 쾌활한 성품으로 극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사진 국립극단
하버드 천문대에 가서도 헨리에타는 최저 시급 25센트짜리 ‘아르바이트’ 취급을 받는다. 여성은 천문대 망원경 사용조차 금지된 탓에, 건판에 찍힌 별을 수도 없이 맨눈으로 분류할 뿐이다.
하버드 최초의 여성 컴퓨터(계산원)이자 뛰어난 광도 측정가 윌러미나 플레밍(박지아), 수십만개 항성을 분류하고 항성 분류법 기준을 마련한 애니 캐넌(조승연) 등 업적을 세운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하버드 천문대 대장 에드워드 피커링의 이름을 딴 ‘피커링의 하렘(금남 구역)’으로 불리며, 자신의 성취가 발판이 된 중요한 연구에선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배제됐다.
‘사일런트 스카이’는 이런 남녀 대결 구도 대신, 시대의 장벽을 뚫고 삶과 우주를 개척하는 여성들의 연대에 초점을 맞춘다. 출연 배우 5명 중 남성은 피커링 대장의 제자 피터 쇼 역을 맡은 정환 뿐이다. 극 중 유일하게 실존 인물이 아닌 그는 헨리에타와의 짧은 로맨스 뿐 아니라, 여성의 과학계 진출을 가로막는 세간의 선입견, 여성 과학자에 대한 남성들의 질투, 변화하는 모습까지 대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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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여성 과학자 인터뷰하며 캐릭터 준비"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언니 헨리에타(안은진, 왼쪽부터) 대신 목사 아버지와 집안을 보살펴온 동생 마거릿(홍서영)은 교향곡을 쓰겠다는 음악에의 열정을 키우며 마지막 순간까지 언니 곁을 지킨다. 사진 국립극단
헨리에타와 애니, 윌러미나의 연구 열정은 침묵을 강요받을수록 밝고 강하게 타오른다. 피커링 대장의 가정부로 일하다가 여성 컴퓨터가 된 윌러미나는 어떤 상황도 웃으며 돌파한다. 애니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도 뛰어든다.
배우들은 하버드 천문대 여성 실화를 재조명한 논픽션 『유리우주』, 『리비트의 별』 등을 “바이블처럼 읽고”(안은진) “현직 여성 과학자들을 만나 인터뷰하며”(조승연) 캐릭터를 준비했다. 윌러미나 역의 박지아는 “윌러미나는 혼자 아들을 키우는 ‘워킹맘’이자 가장이었다. 시간을 쪼개 일하면서도 많은 업적을 이뤄냈다는 게 대단했다”고 말했다.
연극 '사일런트 스카이'에서 여성 연구자들에게 사용이 금지됐던 하버드 천문대 망원경은 연극 말미에 단 한차례 모습을 드러낸다. 오는 21일 공연 이후엔 천문학자의 강연도 진행된다. 사진 국립극단
무대를 내내 수놓는 작은 별빛들은 헨리에타의 연구가 우주의 진실에 다다를수록 환해진다. 그가 세페이드 변광성의 광도와 깜빡이는 주기의 상관관계를 밝혀낸 레빗 법칙은 천문학자 에드윈 허블이 우주의 팽창을 입증한 ‘허블의 법칙’의 근간이 된다. 그러나 헨리에타의 이런 공로는 암으로 세상을 떠난 뒤에야 세상에 알려졌다. 김 연출은 “21세기가 다양성과 동시대성을 기준으로 펼쳐지고 있다”면서 “역사적으로 지워졌던 개인들의 이야기가 앞으로 더 힘있게 드러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공연시간은 120분(인터미션 없음), 12세 관람가.
나원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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